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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개념 정리

주나라 : 봉건제도의 시작

by 로위너 2023.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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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의 무왕이 폭정을 일삼던 은(상)나라(*이하 은나라로 표기)의 주왕을 물리치고 새로운 중원의 패자가 됐다. 주나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주나라

주나라는 원래 은나라의 제후국인 서쪽의 주(周)족이었다. 주족일 때 은나라 왕실에 의해 계력이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문왕이 태공망과 함께 은나라를 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문왕이 죽고 그의 아들 무왕 때 이 계획은 실행된다. 주족이 성장해 은나라를 친 것이다. 

 

주나라 무왕은 기원전 1046년, 도읍을 호경으로 옮겨 주 왕조를 개창한다. 그러나 주나라에 바로 위기가 찾아온다. 무왕이 2년 후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성왕이 갑자기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때 무왕의 동생 주공단이 성왕을 보필해 주의 지배력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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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도

주나라는 점점 확대되는 영토, 많아지는 주민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이 필요했다. 중앙에서 왕이 방대한 영토를 모두 통치한단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 그래서 간접통치를 위해 제후들을 포섭하고 통제할 방법을 찾게 된다. 주나라는 이때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통치제도인 봉건제도를 창안한다. 

 

봉건제도는 직할지를 제외, 전국의 영토에 왕실의 혈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임명해 다스리게 하는 제도다. 제후는 왕에 의해 봉해져 유사시에 병력을 지원하고 해마다 공물을 바쳤으나 왕은 제후의 지역 내정에 간섭하진 않았다. 아직 청동기 시대라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주나라가 광대한 지역들에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봉건제도란 통치제도 덕분이다.

 

서양에도 계약으로 맺어지는 봉건제도는 있었다. 하지만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혈연적 특색을 더한 종법제도로, 왕과 제후는 단순한 정치적 군신관계를 넘어 공동의 조상을 모시는 한 혈족, 집안임을 내세웠다. 도읍의 중심에 주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를 두었고 주나라가 정복한 은나라의 제사도 중시해 그들의 후손을 제후국에 봉한 뒤 조상의 제사가 끊이지 않게 했다. 왕은 제후들에게 군권의 상징인 관복과 무기를 제공했고 제사라는 신성한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군신관계를 확고히했다. 

 

적장자 중심의 가족 질서 운영이 기본인 종법제도는 나라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고 특유의 예문화를 정착되게 했다. 정실 부인의 맏아들을 대종(大宗), 나머지는 소종(小宗)이라 하는데 소종은 대종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왕은 천하의 대종으로 왕위도 적장자 계승 원칙을 내세웠다. 제후는 자신의 봉국 안에서 대종이 되며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이렇듯 철저한 위계질서가 사회 전반에 걸쳐 확립된다. 이는 주례(周禮)라는 보다 엄격하고 치밀한 예절규범으로 강화됐다. 의식주를 포함 일상의 모든 생활들이 신분에 따라 정해진 절차를 따르고 제약이 가해지는 중국 특유의 예문화가 되었다. 이는 오래도록 제국들에게 이어지고 종국엔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중국적 생활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서주시대

주나라는 서주(기원전 1046~770년)시대와 동주(기원전 770~256년)시대로 구분된다. 유목민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를 원래 도읍인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옮긴 것을 기점으로 나눈 것이다. 즉 서주시대는 도읍이 서쪽 호경에 있었던 시기를, 동주시대는 도읍이 동쪽의 낙읍에 있던 시기를 말한다.

 

서주의 멸망은 하나라와 은나라가 망한 이유처럼 색정에 미친 왕 때문에 망했다. 서주의 유왕은 포사라는 미인 후궁을 아꼈는데 그녀는 잘 웃지 않는 여자였다. 봉화는 나라에 전쟁이나 왕에게 위험이 있는 등 긴급 시에만 울리는데, 어느 날 오보로 봉화가 울려지고 전국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도읍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오보였단 사실에 제후들은 맥이 빠져 되돌아간다. 이를 보며 포사가 웃자 그 뒤부터 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 자꾸 봉화를 거짓으로 올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왕의 명을 재촉하게 된다. 계속 속아온 제후들은 유왕이 견융의 침입으로 올린 진짜 봉화를 보고도, 이번에도 거짓이라 생각해 아무도 달려가지 않았다. 결국 유왕은 견융의 침입을 받아 여산 기슭에서 살해되고 주 왕조는 도읍을 동쪽의 낙읍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이를 주의 동천이라 하며 이때부터 동주시대라 부른다.

 

동주시대

주 왕조가 도읍을 서쪽의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옮긴 후를 칭하는 동주시대. 훗날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뉜다. 춘추시대는 공자의 <춘추(春秋)> 책에서 이름을 따왔고 전국시대는 전한시대의 저술책 <전국책(戰國策)>에서 이름을 따왔다. 두 시대를 합쳐서 춘추전국시대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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